'하나님은 두분/영혼의 존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3.22 영혼의 존재(사도들의 사상)-하나님의 교회 5
  2. 2017.03.16 영혼의 존재(사람과 영혼) -하나님의 교회- 2
  3. 2017.03.14 영혼의 존재 -하나님의 교회- 6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22. 01:13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영혼에 대한 지식은

인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치게 하고,

우리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교훈과 함께

흙과 생기, 즉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지음받은 인간 창조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7)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육신뿐만이 아니라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랐던 사도들은

영혼에 대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사도들의 모든 사상은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정립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예수님께로부터 우리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우리 육체가 영혼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육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1)

 


우리의 영혼은 현재 임시용으로 사용하는 장막집,

즉 육체 속에 살지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영원한 집,

영광스러운 부활을 입은 영혼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6~9)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거하시고 우리는 육의 세계에 거하고 있으니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며,

자신과 성도들의 소원은 빨리 육신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육신에 거하는 것은 무엇이고

육신을 떠나는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몸을 떠나고 싶다고 한 존재는 바울의 영혼입니다.

이는 그의 육체가 생명의 본질이 아니라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 그의 본질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확실히 깨달았던 그는 잠시 살다 떠날 육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영혼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21~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라는 의미는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라는 말이 설명하듯이 육신에서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거하기도 하고 육신에서 떠나기도 하는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바울의 영혼인 것입니다.

바울의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2:1~3)

 

 


바울은 14년 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던 사실을 언급하며

그의 영혼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난 바울의 사상은 어떤 것일까요?

 

 

 그가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표현을 했을 리 만무합니다.

이는 바울이 계시를 볼 때, 자신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와 낙원에 갔었는지,

아니면 몸과 함께 갔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존재한다고

여러 구절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셨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베드로는 복음의 생애를 마무리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말씀을 추억하면서

남아있을 성도들을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 1:13~14)

 


베드로는 바울과 동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장막을 벗어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을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이 떠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수천 년 전 노아시대 죽었던 사람들의 영혼이

그때까지도 살아 있으며 옥에 갇혀 있다고 증거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베드로전서 3:19~20)

 


사도 요한도 이 땅에서 순교당한 영혼들이 하늘에 있는 모습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요한계시록 6:9~10)

 

 


육신의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것은 영혼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나의 주인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 속에 갇혀 있는 영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의 생각이었습다.

 


사도들의 표현대로 ‘내’가, 엄밀히 말해 ‘내 영혼’이 육체라는 천막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캠핑을 가거나 야영을 할 때 천막에서 지내는 삶은 단 며칠간인 것처럼

천막으로 비유된 육체 속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잠시 잠깐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하여 천막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비중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명확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16. 01:14


사람의 영혼에 대한 문제는 종교를 떠나 오랜 세월 회자되고 있다. 영혼 존재에 대한 갑론을박은 결론 없이 이어진다.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많다. 겨울이면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손바닥에 득실대는 세균들…. 인간이 가진 시력으로는 그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이들의 존재를 증상이나 증거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플루엔자의 증상은 열과 몸살, 기침 등이 있으며,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또한 피부로 그 증거를 체감할 수 있다. 손의 세균은 현미경을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생령이란 ‘산 영혼’, ‘산 생명’이란 뜻이다. 흙이라는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기(영혼)로 사람이 창조됐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명쾌한 답이다. 누구든지 살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숨쉬고, 먹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속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의 몸속에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열왕기상 17:22)

 

 

 

 


이 내용은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사르밧 지역에 사는 한 과부를 만나 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다. 이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이의 영혼을 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빠져나온 영혼을 몸으로 돌려보내 아이를 살아나게 하셨다. 즉 영혼이 몸과 분리되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몸에 영혼이 없다는 것 자체가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성경에서는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돌아간다’는 의미는 ‘왔던 곳으로 다시 감’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로 간 아이가 하교 후에 돌아간다면 어디로 갈까. 다시 집으로 가야 ‘돌아간다’는 말이 성립된다. 만약 아이가 하교 후 도서관에 들른다면 이는 ‘돌아간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게 되면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셨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 있던 사람은, 수명을 다한 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죽게 된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하나 있다. 예로부터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돌아가다’라고 말한다 것이다. 영혼은 아마도 육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는 옷을 지어 입기 시작했다. 옷은 유구한 역사 속에 변화를 거듭해 갔다.
그리고 명품이라는 브랜드 속에서 고가의 제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몸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또한 옷이 아무리 비싸도 저절로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벗어 놓으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이와 같다. 영혼에서 탈피된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존재가 우리 몸이다. 벗어놓은 옷과 같다. 중요성을 논하자면 옷보다 몸이 중요하듯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영혼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믿을지 말지는 각자에게 달렸다.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14. 03:11

영혼의 존재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영혼’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무신론자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개중에는 2천 년 전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영혼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대교의 한 당파였던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일부만 인정하고

부활, 천사의 존재와 함께 사람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영혼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도행전 23:8).

 

이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영혼의 근본 원리를 깨닫지 못해 빚어지는 현상이다.

 

 

 

 

 


영혼의 근본 원리는 우리 영혼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혹자는 출생과 동시에 영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옳다면 육신이 소멸할 때 영혼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육신이 죽더라도 영혼은 살아 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세균이나 미생물은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

현미경을 사용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물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혼 세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특별한 도구만 있으면 확인이 가능하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경이 그것이다.

성경에는 창조의 역사로부터 영혼 문제가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생령(生靈)은 사람이 흙(육체)과 생기(영혼)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한다.

생령이란 ‘산 영혼’, ‘산 생명’이란 뜻인데 흙이 생명의 본질은 아니다.

흙으로 빚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령’이라고 하지 않았고,

그 흙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 즉 영혼(신)인 것이다.

 

 

 

 즉 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는 아무 생명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영혼을 결합시켜 살아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살아 있는 상태라면 반대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가리킨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생기)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각각 그 온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흙인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은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육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우리의 영혼은 이 땅에 오기 전 하늘에 있었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천사들이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잠언 8:22~26)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 (욥기 38:1~2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3~7)

 

 

 

 

 

 

 


이 말씀들을 정리해보면,

하늘의 천사들이 죄를 짓고 이 땅에 쫓겨 내려와 잠시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있던 곳이 하늘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 육신을 벗게 되더라도

영혼이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물속에만 사는 잠자리 애벌레는 장차 자신이 잠자리가 되어 누비고 다닐 바깥세상,

곧 푸른 하늘과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곳을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가득한 우주에서 먼지 하나에 불과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장차 허락될 영혼의 세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이사야 40:15).

 

 

출처:패스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