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마음모아 2017. 4. 28. 01:41

승천일과 오순절(초실절)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예수님의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시작으로 전개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갔던 그들이 다시금 열정을 다해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했던 이유는 사도행전 첫 장을 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승천일

 

 

 

 

 

예수님께서는 무교절에 십자가에 운명하셨다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지 40일 만에 사도들과 함께한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부활하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2~9)

 


승천일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날을 기념하는 날입니.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사도들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시며 천국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교육을 통해 믿음을 곧추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 만에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성도들은 120명이었습니다. 이후 성도들은 10일 동안 간절히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끝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오순절은 바로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날입니. 부활절로부터 정확히 50일째 되는 날이며, 2천 년 전 이날,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천하 각국 사람들에게 담대히 예수님을 전파해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루에도 3천 명, 5천 명씩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고, 방언의 능력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일대 전기를 맞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 부활절(무교절 후 안식 후 첫날)을 지켰으며, 부활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는 그리스도의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오순절을 지켰습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부활절)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사도행전 20:16)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난 절기의 배열을 보면, 맨 먼저 무교절이 기록되었고, 다음에는 부활절이 기록되었고, 다음에는 오순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고린도전서 16:8)

 


사도 바울이 이방지역인 에베소에 체류하면서 오순절까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겠다고 한 내용을 보더라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방지역에서도 오순절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승천일과 오순절

 

 

 

 

이러한 신약의 역사는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 유월절을 통해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절에 홍해를 건너 상륙한 날(안식일 이튿날)로부터 40일째 되는 3월 1일,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는데,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것을 예표로써 보여주신 입니다.

 


10일 뒤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다시 시내산에 올랐는데, 이날이 칠칠절, 신약의 명칭으로는 오순절인 것입니다. 이날은 홍해를 건너 상륙한 날로부터 정확하게 50일째 되는 이었습니다.

 


안식일 이튿날(초실절)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다음 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 (레위기 23:15~16)

 


칠칠절은 초실절(신약의 부활절로, 무교절 후 안식일 이튿날)로부터 7 안식일 다음 날에 지키는 절기로서, ‘안식일을 일곱 번 지나서 지키는 절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49일째 되는 다음 날이 되며, 50일 즉 10일을 다섯 차례 계수하는 의미에서 오순절(五旬節)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4. 19. 23:40

아버지의 유언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래도록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그가 부모님이라면 더욱 뼈저리게 느껴 집니다.
 부모님의 유언은 불효한 청개구리조차 따르게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지막 부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는 한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모독한 거짓 선지자의 최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보여준 과시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실패한 인생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에게는 흉악범의 최후, 혹은 많은 유대인 중 그저 한 사람의 최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의 완성이었습니다.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고결한 선물인 것입니다.

 

 

체포와 심문

 

예수님께서 재판에 회부된 것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난 직후였습니다. 제자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 원인이기도 했지만 매우 중요한 예언을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밤새 산헤드린(유대의 의회 겸 법원)에서 심문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위법이었습니다. 해가 저문 후에는 재판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에 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욕을 당하시며 재판을 받는 동안 제자들은 도망쳤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 끝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형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로마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부임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관저로 끌고 갔습니다. 2차 심문이 어어졌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범죄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결정권을 넘겼습니다. 유대인들의 요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혐의는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한 죄,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 한 죄, 이를테면 신성모독죄에 해당했습니다.

 

 

사형과 운명

 

재판이 마치자마자 즉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형의 첫 번째 순서였던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휘두르는 채찍에는 쇳조각이나 동물의 뼛조각이 달려 있었는데, 죄수가 창상을 입도록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창상의 출혈로 십자가에서 빨리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에 채찍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오는 것은 물론, 때로는 뼈가 드러나거나 내장이 쏟아져 나올 만큼의 깊은 상처를 입혔다.


군병들은 채찍질로 예수님의 온몸을 난도질한 후,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우고 왕들이 입는 홍포를 입히고 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희롱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 침을 뱉고 어떤 이는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군병들과 유대인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해골)라 불리는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 전, 군병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려 했습니다.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마취제였지만 예수님은 사양하셨습니다.


본격적인 십자가형이 시작됐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고정시킨 후 굵고 긴 못을 예수님의 양손과 발에 사정없이 내리쳤다. 금요일 오전 아홉 시경의 일이었습니다.


이어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시편 22:1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죄패가 붙어 있었고 양편에는 두 강도가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형은 죽음 직전까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형벌입니다. 사형수들은 십자가에 달린 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못이 관통한 손과 발에서는 자연히 심한 출혈이 뒤따랐습니다. 때로는 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양손이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출혈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극심한 두통과 고열을 동반합니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겹습니다. 축 늘어진 몸을 가다듬어 숨을 들이마시려면 다리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옵니다. 이 일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됩니다. 사형수들은 이렇게 창상, 출혈, 두통, 고열, 탈진, 배고픔, 갈증, 한기 등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혼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정오쯤 되자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습니다. 어둠은 세 시간 동안 지속됐습니다. 오후 세 시경,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암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빨리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수습해달라고 재촉했습니다. 다리를 꺾는 이유는 숨을 쉬기 위해 본능적으로 다리를 지탱하며 안간힘을 쓰는 사형수들이 빨리 숨을 멎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안락사였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기 때문에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또 다른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출애굽기 12:46, 고린도전서 5:7, 요한복음 19:32~37).

 

유월절과 유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이루셨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유언은 전날 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하셨던 말씀이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무교절의 첫날,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먹을 객실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의 소유로 전해지는 큰 다락방이 준비되었고 저녁이 되어 열두 제자와 함께 자리하셨습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3년에 걸쳐 완성한 벽화 ‘최후의 만찬’은 이 일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15)


예수님께서는 떡을 들어 축복 기도를 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축복 기도를 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하신 말씀에 대한 약속 이행이었다(요한복음 6:54).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성력 1월 14일 유월절이 되면 모세의 율법대로 일 년 된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의 살과 피에 참예하는 새 율법을 세워주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며 보혈을 흘리신 희생의 결정체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6~2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새 언약의 유월절을 선포하시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십자가에서 피 흘려 희생하심으로 유언의 효력을 발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루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새 언약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신비 그리고 위대하신 사랑과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유언은 자녀들에게 있어 사무치도록 뼈저린 것입니다.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4. 13. 23:44

두 개의 율법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즉 옛 언약은 모세의 율법이라 부르고
신약, 즉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율법이라 부릅니다.

 

 

 

 

 

  십계명을 소개하는 모세[필립 뉴 샹페뉴作_1663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굳이 들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 때문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말씀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소중하겠지만 그중에 특히 위의 말씀처럼 절대 가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인 율법,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이사야 51:7~8)

 

 

 


하나님의 구원이 세세에 미치는 자들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백성’이라고 기록하였습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결과는 처참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언 28:9)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않는 자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않고 지키지 않는 자는 기도조차 가증하다고 하셨습니. 그들의 기도가 가증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 하나님께서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조건이 주어집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본 성도, 즉 거룩한 무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없어질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율법은 글자 획수 하나조차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율법이 사실은 두 가지 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계명’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율법이 존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20~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도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사도로서 복음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행했던 전도 방식은 실로 눈물겹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했으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행동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의 열정 어린 전도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 가운데 율법에 대한 중요한 힌트도 얻을 수 있습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한 것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율법이 한 가지였다면 이 말씀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도 알 수 있듯 분명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의 율법 외에 또 다른 율법을 주신 것일까요.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7~8, 13)


첫 언약이란 옛 언약 즉, 구약을 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그 언약입니다. 첫 언약이 흠이 있어 결국 하나님께서는 둘째 것인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율법 자체는 완전하지만 우리가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다시 세워주신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결국 첫 것인 옛 언약은 낡아지고 그리스도의 율법인 새 약속은 세워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옛 언약이 폐해지고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히브리서 7:11~12)


모세 때 제사 형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를 지은 백성은 짐승을 가지고 제사장 아론에게 갔고 아론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백성의 죄를 속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살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이 행했던 대로 떡과 포도주로써 새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율법을 변역해주신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닙니.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이 같은 진리를 잘 깨닫고 있었던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지켜야 합니. 단순히 율법이 폐지됐다고 생각한다면 구원과는 영원히 요원해지고 말 것입니다.

posted by 마음모아 2017. 4. 5. 01:07

유월절을 지키고 유월절을 전하는 하나님의 교회

 


세상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교회가 전하는 유월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구약의 절기를 왜 지키냐 ?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교회가 지키는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본보이신 새언약의 유월절 입니다

 

 

 


--------------------------------------------------------------------------------------------------------------

 

하나님의교회 유월절 구약의 유월절과 신약의 유월절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에 보내셔서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이 죄악 세상에 오셔서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킬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라는 선지자를 애굽에서 보내셨습니다(출3:7~10).

그러나 애굽의  바로는 모세의 요청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여러 재앙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기를 계속 거절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하는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며(출11:4~7),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출12:5 ~11 너희 어린양은 흠없고 일년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 유월절 밤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의 장자를 포함하여

애굽 사람들의 장자가 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출 12:29~3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따라서 유월절은
하나님 백성에게 자유의 날이요  해방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유월절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장래일의 그림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모세는 신약시대 예수님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라고

성경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 18:18~19, 행 3:20~24 비교, 히3:5~6).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듯이,

우리는 죄악 세상에서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2천 년 전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요 8:32~34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유대인들이 남의 종 된 적이 없다고 할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즉 진리가 죄의 종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 1장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계 1: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복음 8장에서는 진리가 죄의 종에서 자유케 한다고 하셨는데 ,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죄에서 해방시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가 담긴 진리로 죄에서 해방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진리가  바로 새언약의 유월절입니다.

 

 

마 26:17~19, 26~28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은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나님의교회 유월절 이처럼 예수께서는  새언약의 유월절을 세우셔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것은,

 신약시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킬것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였던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양의 살과 피로 유월절을 지킴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유월절 양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전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래서 신약시대 성도들은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유월절을 지킴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처럼 애굽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옛 언약의 유월절은 모형과 그림자이고, 

그 실체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킨 새언약의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명대로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처럼,

 신약지대에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새언약의 유월절을 지킨 성도들이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됩니다.

 

 

이러한 유월절을 지키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교회 뿐입니다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31. 20:07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동의 그곳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부“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예루살렘을 이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지금 중동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벽 하나 남아 있는 중동의 예루살렘이 보좌에 앉을 수도 없으며, 찬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경구절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동의 그곳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진출처 [The Western Wall by Golasso]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사도 요한은 계시 가운데 구원을 베푸시는 성령과 신부를 보았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신부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값없이 인류에게 전해지는 장면에서 성경은 끝이 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바로 전장에서 여기 나타난 신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천사를 통해 신부에 대해 확인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사도 요한을 데리고 간 천사가 보여준 신부는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던 사도 요한이 이를 보고

마치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라고 기록했습니다(요한계시록 21:2).

분명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닙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하늘에서 내려온, 사도 요한이 보았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의 어머니십니다. 그런데 이 짧은 성경 구절 속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의 어머니’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며, ‘왜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하는 것과 또 ‘우리’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어머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든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모체가 필요합니다. 즉 생명은 어머니로부터 이어 받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영의 생명은 바로 영의 어머니를 통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과연 영의 어머니가 존재할까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데 왜 ‘나’라고 단수의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의 표현을 쓰셨을까요. 또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도 ‘남자’와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남자’와 ‘여자’라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분명 ‘남자의 형상’과 ‘여자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바로 ‘어머니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 하시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의 생명을 위해서는 분명 어머니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그 어머니 하나님의 등장을 성경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29. 01:05

성경은 심해와 같아서 깊고 오묘한 수수께끼의 연속입니다.
수수께끼는 성경 첫 장부터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라는 하나님`...바로  ‘하나님들’입니다.

 

 

 

 

 

구약성경의 원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복수명사 ‘אֱלֹהִים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들’로 해석되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 39권에 걸쳐 2500회 이상 등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단어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들,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통해

당신을 왜 복수의 하나님으로 표현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델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과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 두 분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하시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도 한 분이 아닌 두 분,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항상 두 분의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엘로힘’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1~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오만한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키시는 역사를 행하시는 분도 두 분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찾으시는 분도 한 분이 아닙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늘 두 분이 존재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입니다.

 

 

 

<하늘 가족의 대표, 아버지 하나님>

 

 

대개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한복음 8:41)”,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5~6)”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한 분만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고 하신 것은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두 분이신데, 성경은 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대표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을지라도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의 이름만 적어 문패를 거는 이치와 같습니다.

 

누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대표성 때문에 그 집에 아버지 혼자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늘 가족에도 이처럼 대표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다른 예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서 5:12~19).

즉,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담이 갖는 대표성 때문입니.

이를 두고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하신 말씀을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여 곡해한 것입니다.

 

 

<엘로힘, 성령과 신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장면은

성경 전반에 걸쳐 담겨 있습니다. 다음은 성경 마지막 장에 묘사된

두 분의 구원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께서 성령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예언입니다.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신부(bride)는 말 그대로

성령의 아내이니 ‘어머니 하나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과 신부는 창조 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신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입니다.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마지막 성령시대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일은 아버지만의 몫은 아닐 것입니.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22. 01:13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영혼에 대한 지식은

인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치게 하고,

우리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교훈과 함께

흙과 생기, 즉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지음받은 인간 창조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7)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육신뿐만이 아니라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랐던 사도들은

영혼에 대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사도들의 모든 사상은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정립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예수님께로부터 우리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우리 육체가 영혼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육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1)

 


우리의 영혼은 현재 임시용으로 사용하는 장막집,

즉 육체 속에 살지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영원한 집,

영광스러운 부활을 입은 영혼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6~9)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거하시고 우리는 육의 세계에 거하고 있으니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며,

자신과 성도들의 소원은 빨리 육신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육신에 거하는 것은 무엇이고

육신을 떠나는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몸을 떠나고 싶다고 한 존재는 바울의 영혼입니다.

이는 그의 육체가 생명의 본질이 아니라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 그의 본질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확실히 깨달았던 그는 잠시 살다 떠날 육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영혼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21~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라는 의미는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라는 말이 설명하듯이 육신에서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거하기도 하고 육신에서 떠나기도 하는 존재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바울의 영혼인 것입니다.

바울의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2:1~3)

 

 


바울은 14년 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던 사실을 언급하며

그의 영혼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난 바울의 사상은 어떤 것일까요?

 

 

 그가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표현을 했을 리 만무합니다.

이는 바울이 계시를 볼 때, 자신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와 낙원에 갔었는지,

아니면 몸과 함께 갔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존재한다고

여러 구절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셨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베드로는 복음의 생애를 마무리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말씀을 추억하면서

남아있을 성도들을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 1:13~14)

 


베드로는 바울과 동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장막을 벗어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을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이 떠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수천 년 전 노아시대 죽었던 사람들의 영혼이

그때까지도 살아 있으며 옥에 갇혀 있다고 증거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베드로전서 3:19~20)

 


사도 요한도 이 땅에서 순교당한 영혼들이 하늘에 있는 모습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요한계시록 6:9~10)

 

 


육신의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것은 영혼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나의 주인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 속에 갇혀 있는 영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의 생각이었습다.

 


사도들의 표현대로 ‘내’가, 엄밀히 말해 ‘내 영혼’이 육체라는 천막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캠핑을 가거나 야영을 할 때 천막에서 지내는 삶은 단 며칠간인 것처럼

천막으로 비유된 육체 속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잠시 잠깐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하여 천막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비중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명확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16. 01:14


사람의 영혼에 대한 문제는 종교를 떠나 오랜 세월 회자되고 있다. 영혼 존재에 대한 갑론을박은 결론 없이 이어진다.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많다. 겨울이면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손바닥에 득실대는 세균들…. 인간이 가진 시력으로는 그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이들의 존재를 증상이나 증거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플루엔자의 증상은 열과 몸살, 기침 등이 있으며,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또한 피부로 그 증거를 체감할 수 있다. 손의 세균은 현미경을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생령이란 ‘산 영혼’, ‘산 생명’이란 뜻이다. 흙이라는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기(영혼)로 사람이 창조됐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명쾌한 답이다. 누구든지 살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숨쉬고, 먹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속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의 몸속에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열왕기상 17:22)

 

 

 

 


이 내용은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사르밧 지역에 사는 한 과부를 만나 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다. 이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이의 영혼을 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빠져나온 영혼을 몸으로 돌려보내 아이를 살아나게 하셨다. 즉 영혼이 몸과 분리되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몸에 영혼이 없다는 것 자체가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성경에서는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돌아간다’는 의미는 ‘왔던 곳으로 다시 감’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로 간 아이가 하교 후에 돌아간다면 어디로 갈까. 다시 집으로 가야 ‘돌아간다’는 말이 성립된다. 만약 아이가 하교 후 도서관에 들른다면 이는 ‘돌아간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게 되면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셨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 있던 사람은, 수명을 다한 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죽게 된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하나 있다. 예로부터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돌아가다’라고 말한다 것이다. 영혼은 아마도 육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는 옷을 지어 입기 시작했다. 옷은 유구한 역사 속에 변화를 거듭해 갔다.
그리고 명품이라는 브랜드 속에서 고가의 제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몸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또한 옷이 아무리 비싸도 저절로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벗어 놓으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이와 같다. 영혼에서 탈피된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존재가 우리 몸이다. 벗어놓은 옷과 같다. 중요성을 논하자면 옷보다 몸이 중요하듯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영혼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믿을지 말지는 각자에게 달렸다.

 

출처:패스티브

posted by 마음모아 2017. 3. 14. 03:11

영혼의 존재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영혼’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무신론자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개중에는 2천 년 전 사두개인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영혼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대교의 한 당파였던 사두개인들은 성경의 일부만 인정하고

부활, 천사의 존재와 함께 사람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영혼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도행전 23:8).

 

이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영혼의 근본 원리를 깨닫지 못해 빚어지는 현상이다.

 

 

 

 

 


영혼의 근본 원리는 우리 영혼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혹자는 출생과 동시에 영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옳다면 육신이 소멸할 때 영혼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육신이 죽더라도 영혼은 살아 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세균이나 미생물은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

현미경을 사용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물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혼 세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특별한 도구만 있으면 확인이 가능하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경이 그것이다.

성경에는 창조의 역사로부터 영혼 문제가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생령(生靈)은 사람이 흙(육체)과 생기(영혼)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한다.

생령이란 ‘산 영혼’, ‘산 생명’이란 뜻인데 흙이 생명의 본질은 아니다.

흙으로 빚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령’이라고 하지 않았고,

그 흙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 즉 영혼(신)인 것이다.

 

 

 

 즉 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는 아무 생명력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에 영혼을 결합시켜 살아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살아 있는 상태라면 반대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가리킨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생기)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각각 그 온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흙인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은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육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우리의 영혼은 이 땅에 오기 전 하늘에 있었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천사들이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잠언 8:22~26)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 (욥기 38:1~2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3~7)

 

 

 

 

 

 

 


이 말씀들을 정리해보면,

하늘의 천사들이 죄를 짓고 이 땅에 쫓겨 내려와 잠시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있던 곳이 하늘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 육신을 벗게 되더라도

영혼이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물속에만 사는 잠자리 애벌레는 장차 자신이 잠자리가 되어 누비고 다닐 바깥세상,

곧 푸른 하늘과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곳을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가득한 우주에서 먼지 하나에 불과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장차 허락될 영혼의 세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이사야 40:15).

 

 

출처:패스티브